경복(景福),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로부터 첫 번째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개국 3년 만인 1395년 완공된 궁궐은 390여 칸으로 한양의 중심축에 자리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등 뒤로는 주산(主山)인 북악산을 두었고 궁의 정면인 광화문 밖으로는 육조 거리를 두어 시가지를 만들었다. 그 앞쪽에는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었고,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렀다. 새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궁(法宮)이 자리하기에 더없는 명당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길한 기운 덕일까 새 왕조는 영욕의 시간 가운데 무려 600년이나 이어졌다. 다만 경복궁의 역사는 그러하지 못했다.

1553년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강녕전에서 시작한 불길은 근정전(勤政殿) 북쪽 대부분을 태운 후에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듬해 복구가 이뤄졌고 전소의 수준은 아니었다. 경복궁이 완전히 불타버린 건 임진왜란(1592년) 때 왜군의 소행으로 짐작한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그 터가 길하지 못하다고 해 창덕궁에게 법궁의 지위를 넘겨준 채 방치됐다.

경복궁이 되살아난 것은 그로부터 270여 년이 지난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였다. 대원군은 330여 동, 7225칸 반의 경복궁을 중건함으로 왕권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이것이 조선 왕조가 이룬 경복궁의 마지막 영화였다. 1876년에는 대화재로 교태전 등 내전 다수가 손실됐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최고의 법궁, 경복궁은 철저하게 해체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려 전각의 90%가량이 철거됐고, 1917년에는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경복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창덕궁의 내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고, 심지어 1926년에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으며, 건청궁에는 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경복궁 훼손의 방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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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맞춤버스), 8000(맞춤버스), 8000(맞춤버스), 8000(맞춤버스), 8000(맞춤버스), 7022, 1711, 1020, 7018, 7016, 7212, 7022, 1020, 7018, 7016, 1711, 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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